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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저녁의 공기

by likeitnow 2015. 4. 30.

아직도 생각 나, 그 밤. 


초여름 밤이었나,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 어둠이 깔려 있었는데, 공기는 청량하고 동네 골목길에선 익숙한 소음이 들렸어. 골목 끝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이들 소리, 개 짖는 소리. 우리집은 긴 골목길이 꺽이는 코너에 골목길을 마주 보고 있어서,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 골목길로 쭈욱 늘어선 구멍가게, 이발소집, 앵두나무집, 쌀집을 한 눈에 볼 수 있었어. 그때 나는 짧은 커트머리를 하고 있었고, 특별히 할 공부도 없었으니, 아마 초등학교 5, 6학년쯤 되었던 것 같아. 한가하고 여유로운 저녁이었어. 그때는 뛰어 노는 것 외엔 몰랐던 시절이라 한가하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지만. 아무튼 현관 문을 열고 나서서, 낯익은 풍경 위로 깔린 어둠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밤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어. 아, 어둠이 달콤하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계단 위에서 나는 혼자였지만, 현관문 안에서는 가족들이 얘기하는 소리와 티비소리가 들려서 안심이 되었어.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밖에는 꽤 낭만적인 저녁 공기가 가득차 있어서 나 혼자, 이런 거로구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 그 저녁의 기억이 얼마나 생생했는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각나.


아, 맞다.

그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오빠는 용돈을 받아 그 돈으로 야한 소설을 사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속으로 엄청 씩씩대면서도, 오빠가 없는 틈을 타 그 소설을 몰래 보곤 했었어. 그때 소설의 여주인공이 밤에 복숭아 밭에서 남주랑 키스를 하는 장면이 있었어. 아마도 그때 여주인공이 만난 저녁은 이런 저녁이었을 거라고, 쥐뿔도 모르는 초딩 주제에 상상의 나래를 펼쳤네.


갑자기 그 밤이 떠오른 건, 밤낮으로 회사에 메여 시간의 흐름을 잊고 살다가 만난 늦 봄의 오후가 너무 아름다워서일 거야. 이렇게 여유롭고 아름다운 봄날의 오후가 요즘 매일 매일 펼쳐지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야.